一. 화엄종대본산 약사사 창건연기

약사사는 인천시내(구도심)에서 정동쪽에 위치한 만월산 아래 터를 잡고 있다. 인천의 대표적인 지명가운데 하나인 주안(朱安)이 바로 이 만월산 중심으로 유래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성종때 발간된 동국여지승람(제9권 불우조)에 보면 인천도호부 북쪽11리 되는곳에 주안산(朱雁山)이 있다고 하였다. “대동여지도”에는 주안산으로 나타나 있으며 근세에는 원통산 또는 선유산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바로 그 산이 지금의 만월산이다. 이산의 동쪽에는 고려시대 왕명으로 세웠다는 개국사(開國寺)가 있었고 산 아래(현 위치 약사사터)는 항상 백명의 스님들이 수행정진 하고 있다고 해서 백인사(百人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주안산 주안사(朱雁寺)로 바뀌었다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치풍토에 밀려 절이 폐쇠되는 비운을 맞아 수행하던 스님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청정도량은 잡초만 무성한채 세월속에 묻혀 정조때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보면 자료가 없는 것으로 나와 있다.. 조선조를 세운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이 산에 올라 주변지세를 둘러보니 아흔아홉 고을뿐 한 고을이 부족하여 도읍지로 정하지 못해 원통하다 하여 현재 약사사앞을 지나가는 경인국도를 원통이길(원통고개) 이라 한다.

▲ 약사사 전경

▲ 약사사 설경
(우연의 일치인지 만월산 뒤에는 시립묘지와 화장터가 있다) 또 이 산 아래에는 향기나는 돌우물이 있어 조선조 세종때 사람을 보내 물 맛과 향기 및 약효등을 조사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그 위치는 어디인지 자세히 알수는 없다. 현재 있는 약수터에는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고 넘치는 물은 연못을 이루고 있는데 갖가지 생명들이 도심공해에 소멸되지 않고 살고 있으며 연꽃(수련)이 피어 있다. 만월산이란 지명은 1920년경에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하시던 보월(普月:韓性安)스님께서 우연히 이곳을 지나시다가 산정상에 올라서 보니 산은 그리높지 않지만 동서남북이 한눈에 다보이고, 특히 산세가 인천 도심쪽을 향해 좌우로 팔을 벌려 모든 만물을 감싸안을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보고 이곳이야말로 저 많은 사바세계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참법을 쉽고 가까이에서 만나게 해 줄 수 있는 좋은 장소라 생각하여 동방만월세계약사유리광불 (東方滿月世界藥師琉璃光佛)이 계신 연원을 취해 만월산이라 칭하시고 이산 8부능선에 움막을 짓고 수행정진 하시다가 1932년에 서울에 있던 선친의 재산을 처분하여 이 땅을 구입하여 월승능해(月昇凌海-韓永錫)스님께 -“양산통도사에서 법경스님께 대교과를 이수하고 개성 안화사에서 일승회명(日昇晦明)스님께 구족계를 받으시고 전국선방을 돌며 참선구도에 전념하심”- 당신의 수행처를 크나큰 도량으로 발전시키라는 원을 부촉(咐囑)하시고 다시 금강산 유점사로 들어가셨다. 그후 보월스님의 큰 뜻을 이어 받으신 능해스님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려 대웅전(현:약사전)을 새로짓고, 칠성각, 산신각, 미륵불, 염불당을 건축하는등 끊임없는 서원으로 작은 암자에서 오늘의 약사사 대가람을 이룩하였으며, 현재 인천시 신흥동에 위치한(해방전 조동종화엄사)를 인천시로부터 인수하여 지금의 해광사(海光寺)로 개칭하고 대중포교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二. 화엄종의 창종과 역사성

때가 되어 1966년도에 약사사를 대본산으로 하는 화엄종(華嚴宗)을 창종하였으니 화엄종의 종지는, 부처님의 최초 깨달음의 상태이신 화엄경 사상을 바탕으로 삼고, 종조(宗祖)는 원효스님을 받들고, 실천행에 있어서는 화엄경 보현보살 행원품에 의하여 모든 중생을 근기에 따라 알맞은 방편으로 깨우쳐주며, 항상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행동하여 결국 수억겁 윤회고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무명의 혹을 떼어내고 본래면목 청정무구(本來面目淸淨無垢)한 상락아정(常樂我靜)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늘 편안한 불국정토”- 이 모든 국토 모든 중생들의 삶이 되는 것을 큰 목적으로 삼는다 하였다. 화엄종은 우리나라에서 독특한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 불교가 중국의 당나라를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 들어왔고, 당 나라의 정치, 문화 ,물물거래등의 인과관계가 빈번했던 만큼 선지식의 공부를 확인하려면 당나라 고승의 인가를 얻어야만 되는 것인줄 알고, 그 당시의 사람들은 너도나도 당나라에 들어가 공부하고 당나라 고승의 인가를 얻으려 하였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원효성사께서는 의상스님과 당나라로 공부하러 떠나가던 도중,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바닷가 근처 들판에 이르러 비를 만나 움집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잠을 자던중 심한 갈증으로 더듬 거리다가 바가지 같은 것에 물이 담겨 있기에 그 물을 시원하고 고맙게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것은 사람이 해골 속에 빗물이 고여 있던 것이었음을 알고서는 이내 토해내고 역겨워 하던중 일순간 마음의 작용을 깨닫게 되었다. 부처님 말씀에 모든분별은 마음에서 일어나며, 사람의 마음에는 모든 분별을 넘어서 자유로운 경지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이치를 가르치신 것이로구나. 모든 것은 한 생각의 차이 때문에 그 물이 더럽다. 또한 깨끗하다는 분별심을 내었구나. 어젯밤 그 해골속의 물도 내 마음이 깨끗한 물이라 생각하니 그렇게 달고 시원했던 물 인 것을. 참 법이란 어느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마음 움직임을 아는 것이 나 자신에게 있으며, 굳이 당나라에 가려는 것은 바로 이 이치(理致)를 깨닫기 위해서인데 그 이치가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구태여 당나라까지 갈 필요가 있으랴. 하고서는 입당구법(入唐求法)의 발걸음을 되돌렸다. 원효스님은 그때부터 형식에 치우친 의식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사람들과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하며 신분이 낮고 높음을 가리지 않고 저자거리에 뛰어들어 부처님의 참 가르침이 그들 생활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하고 승려라는 조직에 머물지 않고 승속(僧俗)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원효스님은 스스로 화엄경의 근본이치를 밝혀내어, 한 종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화엄종의 효시가 되는것이다. 종(宗)의 이름마저도 인도나 당나라에 없는 분황종(芬皇宗)이라 공칭(公稱)하였고, 지금도 현존해 있는 경주시 분황사는 분황종의 총본산 이였으며 원효성사께서 오래 주석하시던 곳이다. 또 다른 화엄종파는 의상스님이 당나라의 화엄종 제2조인 지엄대사의 지도를 받고 신라로 돌아와 부석종을 창종하였지만, 고려말 이조 초 까지 종풍이 이어 지다가 이조시대 배불정책에 의한 강압적인 종파폐합으로 말미암아 교종계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근세에 들어 회명일승 대법사의 유훈을 받들어 능해월승 대종사께서 면면히 이어 오던 분황.부석 양종의 종지, 종풍을 그대로 되살려 화엄종(華嚴宗)을 재창종하게 된 것이며, 해원(초대종정 능해스님 법을 이은 二世종정)스님께서는 사바세계 사람들의 끝없는 윤회고를 본래 청정무구한 불성으로 되돌리고 키우자는 서원으로 재단법인 화엄승가장학재단(1978년)과 공익법인 대한불교화엄종장학회(1992년)를 설립하여 경제자립이 어려운 가정의 중.고등학생과 불교대학과 학생들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원해주고 있으며 대웅보전과 극락전을 새로 증축하여 더 많은 대중들을 쉽고 빠르게 부처님께 귀의 시키고자 팔십노구 임에도 아랑곳없이 화엄경보현행원품의 보현보살님같이 말없는 실천과 크나큰 서원을 보이시려는 듯 아침마다 손수 도량을 쓸어내시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시다 사리 12과를 남기시고세수81세에 입적에 드셨다. 二世종정 해원스님의 종지종풍을 이어받은 주지 화응스님과 사부대중은 세계 곳곳에서 이념과 이념들의 끝 없는 갈등으로 인한 전쟁을 하루빨리 종식 시키고, 남북평화 통일이 되어지기를 기원하며, 부처님의 참 진리의 말씀이 각 가정마다 쉽게 접목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방대하고 고차원적인 화엄경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낸 신라시대 의상스님의 화엄일승법계도를 실체화 시키는 불사에 매진하며 수행정진중이다.

<공익법인 대한불교화엄종 총무원 만월산 약사사>
Copyright ⓒ 2003, 약사사.KR  All Rights Reserved.